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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이슈

우-러 전쟁에도 '인천상륙작전' 통하나? <30>

by 마우대100 2024.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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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Battle of Incheon)은 세계 전쟁사에 빛나는 '탁월한 작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을 뚫고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한 북한 김일성(金日成) 군대는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서울, 대전 등을 순식간에 손아귀에 넣어버렸습니다. 포효하는 북한군의 그 기세가 얼마나 강했던지 전쟁 시작 한 달여 만에 포항-영천-군위-칠곡-달성-영산-함안-마산을 잇는 전선, 즉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어붙였습니다. 남한 국토의 90% 이상을 점령해 버린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사력을 다해 이 전선을 버텨내고 있었지만 북한군의 완전 점령이 코앞에 있었습니다. 이 전선이 무너지면 임시수도가 있는 부산까지 점령되어 대한민국은 적화(赤化)가 마무리되고 지구상에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신세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신(神)은 대한민국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았습니다. 유엔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전선(戰線) 상황을 예의주시한 채 대비책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6·25 전쟁 발발 이후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때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 전세를 역전시키겠다'는 구상을 이미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1930년 육군 참모장으로 진급한 뒤 1937년 퇴역한 맥아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복귀, 필리핀 주둔 극동사령관과 남서 태평양군 최고사령관을 맡아 다양한 상륙작전을 펼치는 등 대일작전을 지휘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1950년 6ㆍ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 군대는 침공 이후 한달여만에 국토의 90%를 장악해버렸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연합국군 최고 사령관이 되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맥아더는 6·25 전쟁 발발과 함께 다시 유엔군사령관이 되어 한반도 전선으로 돌아왔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함으로써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해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이뤄진 인천상륙작전에는 유엔군과 한국군 등 7만 5,000여 명의 병력과 각종 해군 함정 261척이 투입되었습니다. 이 작전 성공으로 북한군은 후방 보급로가 끊기면서 낙동강 방어선에서 퇴각해야 했고, 작전 개시 13일 만인 9월 28일 서울을 빼앗기는 등 전세는 역전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전쟁에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지휘관의 작전이 주효하면 전쟁 승패를 바꾸어버리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1950년엔 맥아더에 의한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다면 74년이 지난 2024년에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시르스키(59) 사령관에 의한 러시아 기습 침공작전이 감행되었습니다. 지구촌 사람들은 러시아에 대한 우크라이나군의 기습 침공작전이 전격적으로 이뤄지자 "약체국가인 우크라이나가 엄청난 양의 핵무기까지 가진 세계 최강국 러시아를 침공했다고?"라며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2022년 2월 독재자 푸틴의 명령을 받은 러시아군의 침공 이후 지금까지 3년이 넘도록 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죽거나 다치고, 전 국토가 황폐화되는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2014년 크림반도를 빼앗긴 우크라이나는 이번 침공으로 헤르손과 마리오폴을 중심지로 한 남부지역을 러시아에 점령당한 채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크라이나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자유국가들의 강력한 군사적 지원을 받자 러시아군이 점령한 남부전선을 그대로 둔 채 대규모 군 병력을 수미 쪽 동부 국경선을 통해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으로 밀고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우크라이나군의 러시아 침공 뉴스가 처음 긴급타전되었을 땐 지구촌 사람들은 "설마 그럴 리가..."라며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은 침공을 제대로 준비했고, 그 준비는 통해서 파죽지세로 러시아 내부 깊숙이 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전혀 예고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우크라이나군이 들이닥쳐 점령지역을 넓혀나가자 쿠르스크를 포함한 해당 지역 수십만의 러시아 주민들은 혼비백산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또 많은 러시아 군인들이 우크라이나 군대의 공격을 받고 궤멸되거나 포로로 잡혀 포박된 모습이 영상으로 속속 전해지고 있습니다. 러시아군 입장에서는 방심하고 있다가 옆구리를 강하게 얻어맞고 뒤뚱거리는 형상입니다. 3년 전 푸틴은 손쉽게 우크라이나를 점령, 자신의 치하(治下)에 둘 수 있다고 판단하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국민과 군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중심으로 사생결단 분연히 맞섬으로써 푸틴이 오판했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작전 보고를 하고 있는 올렉산드르 시르시키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로이터/연합뉴스)

 

특히 미국을 포함한 주요 7개국 정상(G7)들은 2024년 6월 14일 이탈리아 풀리아주에서 정상회의를 열고 "러시아는 침략 전쟁을 끝내고 우크라이나에 끼친 4,860억 달러(약 675조 원)의 피해를 배상하라."라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러시아와 푸틴에게 침략국-침략자임을 전 세계에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특히 이날 회의에서 러시아 동결자산의 특별 수입을 활용, 우크라이나에 500억 달러(약 69조 원)를 제공키로 했다고 밝힘으로써 푸틴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군에 위한 '러시아판 인천상륙작전'이 어떻게 가능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핵심에 맥아더 장군이 있었다면 우크라이나 군의 러시아 침공의 핵심에는 '도살자'란 별명을 가진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올렉산드르 시르스키가 있습니다. 지난 2월 임명된 그는 구(舊) 소련 출신으로 소련군에서 복무하다 소련 붕괴 후 자신이 속했던 부대가 우크라이나 사령부로 이관되면서 우크라이나로 왔고, 우크라이나 여성과 결혼해서 우크라이나에 정착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2022년 러시아 침공 때 수도 키이우의 지상군 사령관으로서 수도 방위를 지휘한 그가 러시아 침공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시르스키는 이번 작전을 위해 몇 가지 비책(秘策)을 썼다고 합니다. 첫째가 우크라이나 부대를 쿠르스크까지 이동시킬 때 대규모가 아닌 일부만을 차출, 조용하고 신속하게 이동하는 작전을 펼침으로써 러시아군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하도 은밀해서 우크라이나 군인들조차 러시아 기습 공격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지휘부는 병력 이동 때 "훈련 중"이라거나 "새 장비를 수령하러 간다"라는 구실을 댔다고 합니다. 

 

둘째로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사복 차림으로 다니거나 막사 등을 짓는 대신 빈집에서 대기시켜 러시아군의 시선을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로는 러시아 병력이 집결한 교전지대가 아닌 '사각지대' 국경을 공략하는 허 찌르기 전략을 구사했고, 네 번째로는 동맹국 미국에도 기습 공격을 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군 고위층에도 사흘 전에야 공유시켰다고 합니다. 기습 공격이 성공하려면 군 지휘부의 주도면밀한 계획 속에 철저한 은밀성을 담보해야 하고 과감한 전략을 펼치며 일사불란하게 돌진하는 병사들의 용감성이 합쳐져야 합니다. 그런데 시르스키 총사령관은 주도면밀하게 준비했고, 우크라이나 병사들은 국토 유린에 대한 한(恨)이 작동되었기 때문인지 생사를 겁내지 않고 러시아 영내(領內)로 달려들었습니다. 우크라이나 군이 이처럼 전격적인 공격을 감행한 데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반대하는 트럼프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향후 이번에 빼앗은 러시아 영토와 빼앗긴 우크라이나 영토와 맞바꾸기 위한 전략 차원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부디 우크라이나에 의한 '러시아 기습 침공작전'이 소기의 성과를 거둬 하루빨리 우크라이나가 전쟁의 참상에서 벗어나길 기원해 봅니다.

 

마우대100이 전하는 '세상의 창(窓)'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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