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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대학졸업을 앞둔 1983년 11월 모 신문사(新聞社) 공채수습기자로 입사한 뒤 1988년 통신사(通信社)로 옮겨 부산(釜山)을 연고로 차장(次長), 부장(部長), 부국장(副局長), 3개(울산-경남-부산) 취재본부장(取材本部長)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도 본사(本社) 임원(任員)으로 발탁되어 서울에서 3년간 생활하다 2018년 퇴임한뒤 지금은 유유자적(悠悠自適) 부산에서 은퇴자의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겐 특이한 이력이 있습니다. 중학교 시절 배구선수를 했고, 20대 초반 군(軍) 입대를 앞두고 고향인 경남(慶南) 의령(宜寧)의 한 초등학교에서 2개월 동안 배구 임시코치를 한 경험이 그것입니다. 50년, 45년이나 지난 오래전 일이지만 워낙 특별한 경험이어서 당시 생활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기만 합니다. 독자 중에서는 저의 과거 경력을 들춰내는 데 대해서 "그래서 어쩌라고?"라며 의아해 하실 분들도 있겠군요. 그러나 저의 경험담을 끝까지 다 듣고나면 "으음, 그렇군!"이라며 고개를 끄덕이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럼 평생 잊지 못할 중학교 시절의 배구 선수 경험과 2개월간의 초등학교 배구 코치 경험을 털어 놓아볼까 합니다. 1935년생인 부친(父親)은 술을 즐기신 까닭에 69세라는 창창(蒼蒼)한 나이에 돌아가셨지만 185㎝의 장신이었습니다. 부친을 닮아 어릴때부터 또래에 비해 키가 큰 편이었던 저는 중학교에 들어가서 배구 선수로 뽑혔습니다. 동기 중에는 경상남도 배구대회에서 우승까지 했던 인근 초등학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중학교 입학 시험제(試驗制)가 없어지고 처음 시행된 학구제(學區制) 덕분에 이들 친구를 같은 학교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배구선수 생활은 중학교 3학년때 접어야 했습니다. 의령군 대표가 된뒤 함안(咸安)-합천(陜川) 대표팀과 지역 예선전을 치르고 출전한 전국소년체전 경상남도대회에서 심판(審判)의 '만행(蠻行)'으로 1회전 시합에서 탈락했기 때문입니다. 배구에 푹 빠진 저는 당시만해도 특기생으로 고교에 진학, 배구인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상태였지만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경위는 이렇습니다. 마산(馬山) 모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마산시 대표 M중학교와의 1차전에서 우리 팀은 정말 황당한 일을 겪었습니다. 안경을 쓴 작은 체구의 심판이 우리 팀에게만 불리한, 말도 안되는 판정을 일삼은 것입니다. 우리 팀 코트에 떨어진 볼이 분명히 '아웃'인데 '인'으로, 상대팀에게 떨어진 볼은 '인'인데도 '아웃'이라고 선언하는 등 일방적인 '편파 판정'을 해댔습니다. 대회 우승을 겨냥했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지만 우리 팀은 그 심판의 부정행위에 발목이 잡혀 세트 스코어 1-2로 분패하고 1차전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우리 팀을 이긴 M중학팀은 결국 우승, 경남도 대표로 전국소년체전 대표로 출전했고요. 이 억울한 광경을 지켜보시던 부친이 심판에게 거칠게 항의하자 심판이 도망가는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저와 동기들은 배구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천진난만한 중학생 선수들을 상대로 왜 그런 나쁜 짓을 서슴지 않았는지 나중에 그 이유를 알고는 더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 심판은 밀양의 모 초등학교 배구 감독인데, 저의 동기들이 초등학교 선수 시절 그가 지도를 해서 11년 연속 경남지역 우승을 이끈 팀을 이겨버린 인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도하던 팀의 12연패(連覇)를 막은데 앙심을 품고 그런 무지막지한 짓을 자행했던 것이죠.
배구인으로서의 미래를 그리고 있던 저와 동기들은 청천벽력(靑天霹靂)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농촌의 작은 학교라 다른 대회에 나가지도 못한 우리는 멘붕상태에서 배구를 접고 한동안 방황해야 했습니다. 저는 학업에 매진한 끝에 고교와 대학 진학을 했고 배구선수가 아닌 언론인으로 인생 방향을 틀어야 했고요. 요즘도 TV로 중계되는 배구 시합을 즐겨 보는데, 그때마다 그 심판의 '악랄한 휘슬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것 같습니다. 50여년이나 지났지만 미래 세대의 꿈을 짓밟아 버린 그 심판의 행각이 트라우마로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과 같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라는 무기가 있었더라면 그 심판의 만행을 만천하에 고발, 응징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기자 생활을 할 때 들려오는 한국 스포츠계의 갖은 비리를 접할 때마다 그 심판의 음흉한 표정과 그가 불어대던 호루라기 소리가 오버랩되기도 했고요. 지금 생각컨대 그 심판은 두 가지 이유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첫째는 11연패를 저지한 선수들을 대상으로 심판이라는 지위를 악용, 그들의 앞길을 막고싶어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른 하나는 M중학교 측으로부터 금품에 매수 당했을 가능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손흥민 선수의 부친 손웅정 감독의 체벌 논란이 이슈화되면서 중학교 시절 심판이 던진 '잔인한 기억'을 또 떠올린 것도 나쁜 심판의 트라우마때일까요? 다음편엔 초등학교 임시 배구 코치 경험 이야기로 손웅정 감독 체벌 논란과 연결지어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마우대100이 전해주는 '세상의 창(窓)'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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